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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2020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의 사회,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하고 고통 당하지 않는 사회, 안정이 최우선인 미래사회이다. '그러한 세계가 정말로 멋진 세계일까?'라는 질문이 바로  작품의 핵심이다. <멋진 신세계> 질문한다. 어떤 사회가 진정 멋진 세계인가? 작품에서 지도자들은 만족스럽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진심으로 노력했던  같다. 그러나 그렇게 과학의 기술을 빌려 고민하고 이룩한  세계가 진정한 이상 세계인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지옥은 악마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이러한 뉘앙스였다. 천국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과는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 된다. 멋진 신세계에서 지도자들은 사회질서가 안정적이고, 사람들은 젊고 건강하고,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해 하며,위기의 순간에는 소마라는 약에 의지하여 감정적으로 시달리거나 고통 당하지 않는 그런 세계, 그들이 공들여 그린 이상적이고 완벽한 천국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한 세계에 성인이 되어서야  발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 야만인 구역에서 태어나 살다가 마침내 그가 그토록 그리던 문명 사회로 진입한 . 그는 멋진 신세계의 실체를 깨닫고 회의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신파블로프식으로 조건 형성이 된다. 그리고 때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괴로운 현실과 그로 인한 불쾌한 감정에 직면하게 되면, 거기서 도피하기 위하여 소마에 의존한다. 그러고 나면 모든 번민과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행복한 감정만이 남는다. 존은 질문한다. 조작된 행복이 행복인가? 마취, 마비, 안정, 평화, 정서적인 긴장의 완화와 안도 등 수동적인 것들이 진정한 행복인가?  사회의 조작에, 지도자의 욕망에 따라야 하는가?  그들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되는가? 동물들은 단순하게 그러한 실험적 조작에 길들여질  있다. 그러나 언어적 존재인 인간은 거대한 실험자의 욕망에 질문을 던질  있다. 그리고  질문은 자신이  실험의 대상임을  처참하게 인식한 후에 나올  있는 질문이다. 존은 말한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고자 하는 세계에서 그는 홀로 외친다. 나는 불행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럴 권리가 있다고. 

 

존은 야만인 세계에도 속할 수 없고, 문명인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그 사이에, 그 틈에 존재하는 자이다. 그렇기에 왜곡된 현실을,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이다. 이발사의 오류가 있다. 한 마을에 사는 단 한 사람인 이발사는 모든 사람을 이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법칙을 만들었다. "스스로 이발하지 않는 사람만 이발해 준다." 그럼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를 이발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발하게 되면 스스로 이발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발 해 주면 안 된다. 반면에 이발 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이발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이발을 해 줘야 한다. 자신이 만든 법칙 안에서 이발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발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갇혀있는 법칙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는 내부에 있으면서 그 내부를 초월하는 외부에 존재하는 자이다. 즉 틈에 존재하는 자로 그 법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는 제1 집합(스스로 이발하는 자)에 속하지 않으며, 제2 집합(스스로 이발하지 않는 자)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영역은 제3의 공간이다.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한 교집합이라기보다는 A도 아니고 B도 아닌 영역이다.  이 틈의 공간은 회의하는 공간이고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다. 그래서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집합 A에도 집합 B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 사이의 공간, 틈

 

존은 조작당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결과 자신을 파괴하는 극단에 이르게 된다. 비정상의 사회에서 정상인은 비정상인이 된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이다. 비정상인들로 이루어진 멋진 신세계에서 정상인에 더 가까운 존은 병리적 존재이다. 현재 우리의 사회는 어떠한가? 나는 또한 어떠한가? 어떤 거대한 실험이 우리 사회에 이루어지고 있는가?  조작에 나는 동물처럼 그렇게 수동적으로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욕망 안에 나의 욕망을 위치시키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의 욕망에.... 나는 질문하고 싶다. 언어적 존재로서, 내부에 있으면서  내부를 초월하는 외부의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틈을 찾고 싶다. 모든 길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곳에 길이 만들어진다. 조작에 이끌리어 모두가 가는 , 이미 만들어진 ,  실험자의 욕망의 길로 나 걸어가고 있다. 틈을 발견하고 타자가 아닌 내가  발을 디디고 걸어가서 나의 길을 만들고 싶다. 그게 불가능이라면  불가능을 통찰하고 싶다. 그것이 위로가 아닌 아픔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작품들이 바로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 내부를 초월하는 외부를 가능케 하는 공간을 드러내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사색하게 되고, 회의하게 되고, 질문하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사회 또한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은  세계….  바로 멋진 신세계

 

 

 

2020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