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고 간다. 양 극단의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번 살지 않기 때문이다. 비교할 수 없기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낫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더 옳은가라는 질문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양극단은 서로 통하는 어떤 것이다. 두 개의 극단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삶은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원운동이다. 그래서 한없이 가벼워지면 무거움을 찾게 되고, 한없이 무거워지면 가벼움을 찾게 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을 때 어떤 부분에서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것 같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무거움을 추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토마시와 테레사,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네 사람의 역학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 존재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이 소설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다. 니체의 영혼회귀 사상, 파르메니데스의 가벼움 예찬, 데카르트의 동물 기계, 키치 등 난해하고 어려운 철학적인 사유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영혼회귀란 무거운 것으로, 다시 태어나도 지금과 똑같은 선택을 무한반복하게 된다는 니체의 사상이다. 이는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한히 다시 태어나도 나는 동일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나의 선택이 결코 가벼울 수는 없을 것이다. 무한 반복하여 살아가도 괜찮도록 너의 삶을 살아가고 너의 삶을 긍정하라는 태도 추천인 것이다. 희생하며 자신의 인생이 아닌 타인의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다시 태어나면 나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또는 10년만 젊어도 용감하게 나를 위한 선택을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서도 동일한 말을 한다. 니체에 의하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동일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동일한 것의 무한 반복인 영혼회귀 사상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적용해 보면, 지금 내가 선택한 그 선택을 내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용기 있게 다르게 선택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대로 지금 다른게 선택할 수 있다면, 나중에도 지금처럼 용기 있게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재의 반복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얼마나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패턴 속에 갇혀 살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 그냥 단 한 번인 것이다. 얼마나 가벼운가!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은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은 부정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쿤데라는 그의 작품을 통해 말한다. 모든 모순 중에서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라고. 그러니 가벼움과 무거움은 존재가 직면한 상황에서 그에 맞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모순은 가벼움이 무거움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무거움이 또한 가벼움일 수 있음을 포함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가벼움과 무거움의 관계와 변화는 직선운동이 아니라 원형운동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가 가벼움을 예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서 무거움을 제할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역사라는 무거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도 당시 체코의 역사적 맥락에서 펼쳐지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잊혀지지 않는 표현이 있다. 지옥 같은 현실은 악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즉 천국을 만들려고 했는데, 결국 이루어진 현실은 지옥이라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 극단도 결국은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쿤데라에 의하면 정치는 키치적인데 키치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배제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 가치, 그리고 사상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이란 영혼이 없는 그저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품에서 테레자는 카레닌이라는 개와의 사랑이 인간 간의 사랑보다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더 좋다는 것이 아니라 더 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는 토리노의 한 마을에서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고는 달려가 그 채찍을 자신이 감당하며 말의 목을 껴안고 울부짖는다. 작품을 통해 쿤데라는 니체가 말에게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며 마치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주인 듯이 행동하는 인간을 향한 쿤데라의 경고의 목소리이다.
쿤데라의 작품은 난해하다. 딱히 이렇다라고 정의할 수 없는데, 이는 독자의 자발적 해석을 위해 결정하기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작가는 의도적으로 의미 생성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인간은 소통할 수 없으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듯이, (기표와 기의가 만날 수 없듯이), 나와 쿤데라 사이에도 소통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분리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토마시, 그리고 운명적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친 테레자. 그 둘의 관계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서로를 이해함으로 나아간다. 토마시의 연인인 사비나, 그녀는 배반의 매력에 빠져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고 싶지 않고 자유롭기를 원하는 그녀는 온몸으로 키치에 저항하는 삶을 추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누구도 키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말이다. 프란체는 어머니처럼 여겨지는 여성인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는 무거움의 의무에 갇혀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비니를 사랑하게 되고, 아내의 말을 통해 결국 그가 그토록 지키려고 노력했던 가정의 모습이 키치였음을, 그저 허구적인 가벼움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들 모두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고 가며 단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간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이라는 운명과, Es konne sein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이라는 우연 사이에 있는 인간은 Einmal ist keinmal (일회성)이라는 삶에서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때로는 상승 욕구를 그리고 때로는 현기증적인 추락 욕망을 느끼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다. 신중함보다는 용기를 선택하여 일어난 30년 전쟁(가벼움)과, 용기보다는 신중함을 선택하여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무거움). 그 반대로 선택했다면 달랐을까?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비교할 수 있는 두 번째 삶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운명과 우연 사이를 오고 가며 나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다. "앞은 설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을 만큼, 지금 이 삶을 반복하여도 좋을만큼 나의 삶을 긍정하는가?
.......
다짐해본다.
무겁게 결정하고 가볍게 행동하기를....... Amor Fati!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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