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오랜만에 우리의 한글소설 김만중의 구운몽을 읽게 되었다. 우리의 것이 소중하고 귀하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은 서양의 것들에 머물러 있다. 정작 행복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우리는 멀리서 파란 새를 찾듯이, 한국인으로서 한국문학보다는 외국문학에 심취해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렇게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이리라.
구운몽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구운몽에는 불교와 도교와 유교의 정신이 모두 깃들여 있다. 주인공 성진은 인간사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와 명예를 그리고 성적인 욕망의 최고절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꿈이었고 그러하기에 덧없고 헛된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네 삶이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서는, 선후관계에 혼란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즉 사람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다. 삶이 현실이든 실제 하지 않는 환상적인 꿈이든 간에, 우리는 오늘 하루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면서.
작품에서 성진은 자신이 육관대사의 벌을 받아 인간세상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원해서 간절히 욕망함으로 지상에 와서 그 욕망을 한없이 펼쳐보는 삶을 살았던 것이고, 그 욕망의 끝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세상의 즐거움이 지겨워졌을 때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즉 자신이 되돌아가고 싶을 때 되돌아 가게 된 것이다. 작품 전체적인 구성에서 성진은 욕망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꿈 속인 인간세상에서만 자신의 욕망을 구현한 것이 아니다. 그가 꿈을 꾼 것 자체가 그의 욕망의 실현이며 되돌아감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앞으로 그의 삶 또한 욕망에 이끌린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 욕망이 불계에 심취하여 크나큰 도를 깨닫게 되는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음을 알아차린 노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고... 그러나 실상 우리는 발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혼미한 상태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의 진정한 욕망을 발견하는 자는... 그 욕망을 알아차린 사람은 더 이상 타자의 욕망을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타자의 시선에 의한 노예가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알아차림과 시선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알아차림이 커지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반비례적인 관계이다.
욕망은 사회에 의해 주어진다. 타인들이 바라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것, 그래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회가 나에게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성진이가 세상에 와서 누렸던 삶이 그러하다. 벼슬에 올라 부와 명예를 쥐고,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며 자녀를 낳고, 그 아내들 사이에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없이 화목한 유교적으로 이상적인 삶을 살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욕망하는 환상적이고 완벽한 그런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왜 이런 삶을 욕망할까? 타자가 욕망하는 삶이기에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삶이 가능한가? 모든 인간에게는 결핍이 존재한다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고 하나의 욕망을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욕망은 대상을 옮겨가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욕망은 불가능이다. 그렇게 남자들이 욕망하는 그런 불가능한 삶을 작품 속의 성진은 실현했다. 소설이기에 가능하고, 소설 속에서도 꿈이었기에 가능했겠지만, 그런 불가능을 바라는 것이 인간 욕망의 구조이다. 시선의 노예 된 삶이 인간 욕망의 구조이다. 알아차림으로 인해 거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알아차림으로 성진은 꿈에서 깨어나지만, 육관 대사의 말처럼, 어떤 삶이 진짜이며 어떤 삶이 꿈인지에 대한 구분은 모호하다.
인간의 욕망의 구조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그리고 서양이나 동양이나 거의 동일하다. 관계적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타자가 욕망하는 동일한 것들을 동일하게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구운몽은 그렇게 욕망하는 인간의 삶이 그저 꿈일 수 있음을 제시한다.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성진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이는 구약성서의 솔로몬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이고 해 아래 새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반복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구운몽>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웠던 점은 나의 한자실력이 부족하여 단어의 뜻, 이름이 내포하는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시들이 나오는데 그에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부족했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잇는 어엿한 한글소설인 구운몽이라지만, 그 당시에는 한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진 작가와 깊이있는 내용의 작품이 있다는 것 무척 자랑스럽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좀 더 한글소설을 접하는 기회를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토불이....
오늘은 한국에 계신 엄마가 더 보고 싶다.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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