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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2019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그의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성향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독자에게 해석을 넘겨주고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일본과 한국에서 하루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에는 세밀한 상황 묘사와 감정 묘사가 잘 표현되어 있어서 읽으면서 머릿속에 자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한 작품이다. '노르웨이의 숲' 노래는 작품 중간중간에도 나오는데, 레오코가 기타로 연주하고 나오코가 감상한다. 다른 노래들과는 달리 이 노래에서만큼은 레오코에게 돈을 내고 기타 연주를 들을 만큼 나오코는 이 곡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홀로 남겨진 외로움을 그리고 있는 이 곡의 가사와 음률이 나오코의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노래가 이 소설의 주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래서 소설의 제목을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했을까? 혹자는 비틀즈의 작품 Norwegian Wood의 올바른 번역은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말한다. 그런데, '노르웨이산 가구'라는 제목은 좀 별로긴 하다. 

 

처음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면서 약간 불편했던 것은 성적인 묘사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인데 거기에는 동성애적 코드도 등장한다. 그러나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러하듯이 그에게 성은 삶의 큰 일부이므로 작품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너무 불편한 사람들은 그의 저서를 읽기가 힘들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하게 하는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 존재와 의미, 생각과 감정, 실제와 환상 등등.......  그러나 이들은 결국 이분법화 할 수 없으며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그 일부로서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듯이..... 

 

이 소설은 주로 주인공의 상실감을 그리고 있다. 그 방황의 시작은 와타나베의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이다. 그 때 그는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함을, 살아 있는 나의 존재 안에 이미 죽음이 드리워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기즈키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는 정신적 이상 증상을 나타내면서 아픔을 공유하는 와타나베에게 친밀감을 느끼지만, 결국 그 허망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 선택을 함으로써 삶을 마감한다. 와타나베는 지난한 여정을 통해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존재의 위치를 망각한 채 길을 잃은 상태로 작품이 끝난다. 그의 앞으로의 삶이 어떠할지는 독자가 각자의 이해와 해석대로 이어가도록 남겨둔 것이다. 

 

또한 <노르웨이의 숲>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작품에서 와타나베는 불빛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그 불빛은 손 끝에서 아주 조금 앞에 있다고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바로 손끝 앞에 있기에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다가가 손을 뻗고 또 뻗지만 그 불빛은 항상 조금 앞에 있으며 결국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로 손끝 앞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빛을 잡을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바로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관계였으며 모든 욕망하는 인간의 욕망 대상과의 관계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나서 나의 현 위치와 방향성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2019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