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감상문 2019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라는 도서를 읽었다. 주인공 니나와 그녀의 언니(나)가 만나서 니나를 사모했던 슈타인이라는 남성의 편지와 일기를 읽으면서 내용들이 전개된다. 그런 면에서 본 작품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서간체 소설에 속한다. 니나의 삶은 그녀의 언니의 삶과 비교가 되고, 또 그녀를 사랑했던 슈타인의 삶과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고통과 부재와 무의미를 견디면서도 삶을 끌어안고 견디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고 적극적 선택을 회피하며 자동 기계처럼 주어진 삶을 잠든 상태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담론으로 다가왔다.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문제이다.

 

먼저, 본문에 나오는 안락사 문제를 보자. 안락사를 선택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나의 삶이 열등하고 부정적이라서 타자에 의해 안락사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니나처럼 나도 강력히 반대한다. 누가 판사처럼 그 기준을 정할 것인가? 여기에는 사형제도까지도 포함된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고 그들은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극심한 고통 중에 더 이상 존엄한 삶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선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커튼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죽음이 자기 자신의 행위이든 누군가의 도움에 의한 것이든 간에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나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니나의 전남편 퍼시 할은 처형당하기 전에 스스로 삶에 작별을 고했다. 니나를 사랑했던 슈타인 역시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 날을 선택했다. 그들은 그렇게 죽고 싶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과 아픔을 처절하게 경험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렇게 죽기를 원했던 이들의 선택에 대해 어느 누구도 쉽게 판단하여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판단을 보류한다.

 

<삶의 한가운데>는 전쟁이 가져다준 참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사회의 부정의에 맞서 대항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타협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가? 니나는 대항하기를 선택하였고, 슈타인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정의와 손을 잡았다. 니나는 이상을 향해 일치된 행동을 했고, 슈타인은 효율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를 고려하며 유용성에 기반한 행동을 하였다. 그들 모두는 시대의 피해자였다.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시대에서 함께 고통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아직까지 전쟁의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으며 그러한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지탱하고 버텨온 불구적 행태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한국사회에 청산되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멈춰있는 것은 계속 멈춰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 하는 이 관성의 법칙이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어서 이곳저곳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흘러가는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나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은 너의 삶과는 다를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또는 저런 모습으로 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나에게 맞는 모습으로 살아내야 한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또는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요구된 삶, 정해진 삶, 도피의 삶이 아니라 내가 써 내려가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의 삶은 타자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록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타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니나가 말하는 삶의 윤리이며 이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윤리와도 일맥상통한다. Les non dupes errant!!!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에 속지 않는 자, 주어진 구조 속에서 정해진 길로 가지 않는 자, 그들은 방황할 것이다. 속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나를 방황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방황을 환영하며 끌어안고자 한다. 

 

나의 목표는 나의 방황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방황 속에서도 삶을 축복하고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니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 있을까?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2019년 9월

'독서 감상문 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 자크 루소 <에밀>  (0) 2020.07.15
서포 김만중 <구운몽>  (0) 2020.07.15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0) 2020.07.15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0) 2020.07.15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0) 2020.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