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처음으로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의 3대 작가로 알려진 체호프이지만,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나는 무지했다. <체호프 단편선>에는 10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그의 독특한 문체와 뚜렷한 결말 없이 막을 내리는 것을 보며 ‘이게 뭐지’ 한동안 멍하게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한 그의 솜씨가 놀라울 뿐이다. 물론 현대에는 이런 종류의 작품이 적지 않겠지만, 1800년대에 이런 시도와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채택한 것은 분명 체호프의 노력과 천재성의 결과이다.
<관리의 죽음> 끈질기게 자신의 실수를 설명하고 이해를 받고자 하는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 공연을 보면서 행복을 만끽하던 그는 한 번의 재채기로 그의 침이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튀었음을 알아차리고 그로 인해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사과에 대한 그의 강박적 집착은 더 큰 오해를 만들어내고 풀어보려던 실타래는 더 얽히게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래서 그로 인해 그는 죽는다. "그냥 그렇게 죽었어? 이게 뭐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정신적 죽음을 상징한 것일까? 아니, 그렇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육체가 실제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맞물려 있으니까. 어쨌든 자신의 실수에 너무 민감하지 말고 하나하나 다 풀고 가려고 하지도 말고, 때로는 그냥 그렇게 두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말이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을 비유한 작품이다.
<공포> 주인공 '나'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의 친구이다. 페트로비치는 삶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공포를 느낀다.. 진부한 삶에 대한 공포, 거짓된 삶에 대한 공포, 아내와의 결혼생활에 대한 공포. 아무 의미 없이 살고 있는 <40명의 순교자>의 삶도 공포 그 자체이다. 어느 날 주인공 '나'는 페트로비치의 아내와 관계를 하게 되고, 그 모습을 들키고 만다. 그 이후 주인공의 삶은 변하였다. 친구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공포가 주인공에게 옮겨진 것이다. 공포란 그냥 단순히 전염될까? 아니면 주인공은 친구의 삶의 한 부분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로인해 공포에 전염된 것일까? 삶은 실로 오묘하다. 삶은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다. 그 삶을 오늘도 살아간다. 나에게 삶은 공포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비에의 초대이다.
<베짱이> 올가 이바노브나는 남편의 가치를 그의 죽음 앞에서야 인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욕망은 항상 내에게 없는 어떤 것이지만, 그것을 내 손에 넣게 되면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예술가인 올가는 그네들의 삶 즉 소박함과 예술적 무질서를 갈구했고 자유분방한 화가와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아픔과 배신과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에 끌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박함과 예술적 무질서에 잠기게 되면 어느새 그것이 끔찍하게 여겨지고 탈출하기를 원할 것이다. 멀리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으면 혐오를 느끼게 마련이다. 어렵게 노력하게 박사학위를 통과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얻지 못한 드이모프는 삶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 그리고 올가는 뒤늦게 남편의 소중함을 알고 새로운 시작을 원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왜 베짱이일까? 겨울에 대한 대비가 없이 현재의 삶을 즐기는 예술가를 빗댄 것일까? 올가가 베짱이라면 남편 드이모프는 개미인가? 겨울을 대비하여 열심히 일하는. 그런데 성실한 그에게도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평생 숙고해야 할 주제이다.
<드라마>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인물 군상과 딱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사고를 치는 인물 군상
<베로치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군상 이야기
<미녀> 두 명의 미녀가 등장한다. 완벽한 부분 부분을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미녀와 하나하나 보면 아름답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모자란 것들의 조합이 너무나 아름다운 미녀이다. 아름답다는 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게 지각하는가? 작품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아름다움의 비밀은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그냥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은 상대적인 것이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나는 전자의 아름다움에서는 꿈처럼 모호한 슬픔을, 후자의 아름다움에서는 사랑스러운 연약함, 영혼의 순수함을 느낀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거울> 넬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전부인 약혼자의 모습을 보고, 그와 함께 하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그 미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미래이다. 미래 여행을 하다가 거울을 떨어뜨리며 현실로 되돌아온다. 이 작품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삶이 결국은 앞서간 이들이 살았던 삶의 반복일 뿐임을 자각하게 한다. 삶이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으로. 그것이 삶을 대하는 올바른 윤리적 자세라고 생각한다.
<내기>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변호사와 은행가가 내기를 했다. 변호사가 15년 동안 독방에서 지내는 데 성공하면, 그에게 은행가가 이백만 루블을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독방에 갇혀 홀로 고독하게 지내며 모든 학문과 지식을 배운다. 6년 반의 시간이 지났을 때, 변호사는 헤아릴 수 없는 지식으로 충만하였다. 그는 수 천 년에 걸쳐서 수많은 천재들이 다양한 그들의 언어로 진리를 말했지만, 그 말들 속에는 오로지 단 하나의 불꽃만이 타오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누리는 천상의 행복을 자랑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일이면 드디어 내기를 시작한지 15년이 된다. 그러면 변호사가 내기에서 승리하게 되고, 약속대로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이백만 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그럴 수 없는 은행가는 15년을 채우기 하루 전 변호사를 죽이기 위해 몰래 독방에 들어간다. 그런데, 변호사는 보이지 않고, 그가 남긴 메모만 있을 뿐이다. 메모에서 변호사는 말한다. 그는 모든 책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고. 인간들이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추악한 것을 미로 받아들였으며, 하늘을 땅으로 만들었다고 거세게 비난한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이제는 그에게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블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한 것이다. 변호사의 자발적 포기로 은행가는 내기에서 승리하였다. 그런데 이 내기는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내기였을까? 소크라테스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는 가장 지혜로운 자였지만, 그러한 지혜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숱한 책을 읽고 접한 사람들 또한 그 끝에 이르러서는 책을 읽는 것이 무익하다고 한다. 모름의 단계를 거쳐 앎의 단계로 나아가지만, 그 앎의 단계 다음에는 다시 모름의 단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모름의 단계는 결코 첫 번째 모름의 단계와 같지 않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님을 모름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아는 단계에 이르지만, 계속적으로 더 나아가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무지는 신비한 무지이며, 초대이며, 진정한 사귐의 시작이 아닐까? 변호사의 이 이후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그는 이제야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될까?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티푸스> 살고자 하는 동물적 기쁨을 죽어가는 육체에 비유하는데, 그 기쁨은 회복되는 순간에 온 존재가 충만해지는 것과 다름없다.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어 행복감과 생명의 환희로 그의 온 존재가 충만하듯이, 인간은 삶을 열망한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일상의 권태와 상실감으로 존재는 불행하다. 그럼에도 죽음의 순간에는 다시 삶을 갈구한다. 이러한 반복의 역설.... 바로 우리네 삶이다.
<주교> 주교가 되고 나서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없다. 어머니를 만나도 주교로서 예를 갖추어서 매우 정중하게 대할 뿐이다. 이런 어머니가 낯설게 느껴지면서 우울함과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에게 일거리는 또한 너무도 많아서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다. 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라 개인적 삶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교라는 그의 위치 때문이다. 사람들이 주교에게 느끼는 두려움은 그의 명칭과 짝을 이루어 함께 오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랬을 리 없는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다. 과거란 무언가가 덧입혀져 아름답게 기억되는 법이니까. 아니면 그 반대이던지. 명예와 권력을 쥐고 있는 주교는 그가 바라는 이상에 다달았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결여되어있다. 이제 주교로서의 삶이 그를 짓누르고 있어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결핍이 없는 자는 없다. 삶에 만족이란 없다. 벗어나고 싶은 그의 욕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수도원의 이 무거운 냄새를 안 맡을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명이라도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혼을 내어줄 텐데!”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고, 죽음으로 그는 자유인이 되었다. 바로 다음날은 부활절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그는 부활한 것인가? 그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죽음 이외에 자유를 얻을 방법은 없었을까? 그는 죽음충동을 느끼고, 마치 두 팔 벌려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환영하는 듯하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끌어당기나 보다.
2019년 5월